마가복음(29)

마가복음(29)
3월 5일
성경: 마가복음 10장 17~31절
맥체인 성경읽기: 가정 (출애굽기 16장, 누가복음 19장) 개인 (욥기 34장, 고린도후서 4장)
<재물과 하나님이 나라, 17~27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 10: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날 때 한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주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7절)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질문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찬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하여 질문하였습니다.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막 10:19)
예수님은 본질적인 선함의 유일한 근원이자 규범인 하나님께 주의를 돌림으로써 응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선한 선생님'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거부하신 것입니다. 선에 대한 질문자의 생각을 규정한 것은 인간적 성취였습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 처음 계명의 멍에를 메었을 때부터 계명을 지켰다고 확신했다는 점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이제 그는 영생을 보장받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다른 '선한 '사람에게 찾기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그는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단 한 분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희망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엎드려 영광을 돌리며 그 질문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린 것은 예수님의 대답을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맥락에 위치시킵니다. 그 사람이 '선'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에 의문을 제기한 예수님의 의도는 자신은 죄가 없다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올바른 관점으로 설정하라는 것입니다.
계명에 대한 호소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접적으로 응답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 것이라는 구약의 가르침을 반영합니다(예, 신 30:15~16; 겔 33:15).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계명의 적용으로 보이는 사기 금지를 제외하고, 인용된 요구 사항은 십계명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 계명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의 분별력 있는 척도로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명확하고 예리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어떤 뜻도 선한 것으로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계명에 대한 그의 확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이웃의 존재를 모두 인정하는 순종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 10:20)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막 10:21)
이 사람의 충동적인 대답은 그가 율법을 자신의 삶의 규범으로 삼았으며, 율법의 요구를 완벽하게 이행했다고 확신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어려서부터'는 소년이 계명의 멍에를 메고 그 이행에 책임을 지게 된 열두 살 때를 가리킵니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던진 그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미래를 보장받은 것 같았으나 뒤에서는 마음의 갈등을 많이 겪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건의 차원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예수님께서 알아차린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를 부끄럽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에게 부족한 한 가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참된 제자의 특징인 자기희생적인 헌신입니다. 개별 계명을 지키는 것이 복음의 부르심을 통해 부과된 하나님의 절대적인 요구에 자기를 굴복시킬 분비를 하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람이 자신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다를 때 율법의 완전한 준수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자기 굴복은 자신의 성취를 포기하고 메시아적 죄 사함을 받고 이를 통해 율법 아래 서서 사랑의 순종을 제공하도록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완전하고 전적으로 요구하며, 무조건적인 순종을 방해할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을 제거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
그 사람은 큰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과 슬픔으로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서기로 한 비극적인 결정은 생명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단호한 자기 부인을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이 부자의 실패를 설명해 줍니다. 부르심에 대한 거절은 포기할 것을 요구받은 것이 크다는 것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열두 제자가 특유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인 됨을 깨닫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스스로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신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막 10:23)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막 10:24)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막 10:25)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겪는 어려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 부자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한 데서 그 힘을 얻습니다. 그의 행동은 재산에 너무 집착하여 성실한 사람조차도 무한히 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구약의 중요한 가르침은 부와 물질을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로 간주했기 때문에(예: 욥 1:10; 42:10; 시 128:1~8; 사 3:10), 유대교에서는 재물이 하나님 나라의 장벽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자들이 직면한 위험은 부로 인한 잘못된 안정감과, 율법과 복음에서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인데도 물질적 자원과 개인의 힘을 신뢰하려는 유혹에 있습니다. 제자들이 놀라움을 표하자 예수님은 절대적 형태로 경고를 반복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냐는 것입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낙타와 바늘에 대한 언급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26절에 나오는 제자들의 반응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말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낙타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가장 큰 동물입니다. 가장 큰 동물과 가장 작은 구멍 사이의 극명한 대비는 인간적으로 말해서 불가능하거나 터무니없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
제자들은 이전보다 더 당황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실제로 어떤 사람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막는다는 것으로 이해했고, 그 함의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제자들의 불안한 질문은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구원은 인간의 능력 범위를 완전히 넘어서는 것이며, 업적이나 공로에 근거하여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모든 시도는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규칙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에 의해 제한됩니다. 구원을 이루는 능력과 권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제자의 상금, 28~31절>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막 10:28)
베드로는 종종 열두 제자의 대변인 역할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제자들을 대변하여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28절).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한 사람(17~27절)과는 달리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막 10:29)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30)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약속과 핍박의 관점에서, 역사를 축복과 고난의 상호 작용으로 규정하십니다. 현 시대와 다가올 시대를 대조하며, 또한 신앙생활에 있어서 약속과 성취 사이의 긴장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충성에 수반될 수 있는 손실에 대한 솔직한 인식은, 한 사회에서 잃어버린 모든 것(29절)이 복음의 역동성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사회에서 백 배로 회복될 것이라는 약속(30절)에 의해 조건화됩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확신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 10:31)
이것은 종말론적이며 다가오는 시대에 세상의 모든 계급이 역전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제자도를 나중에 상을 받기 위해 지금 소유를 포기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면 예수님은 이런 잘못된 개념을 깨뜨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자신을 신실하게 따르는 행동으로 유지되는 자신에 대한 전적이고 근본적인 헌신입니다. 그 대가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자신의 임재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뒷받침되는 현실의 결과를 받아들일 책무를 주셨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포기하였습니까? 무엇을 얻기 위하여 포기하려는 인간적인 의도는 버려야 합니다. 진심으로 주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김일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