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23)

by 주인장 posted Jan 26, 202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히브리서(23)

420349475_1332135231517353_5647086985267714122_n.jpg


1월 26일 

성경: 히브리서 12장 1~13절 / 제목: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맥체인 성경읽기: 가정 (창세기 27장, 마태복음 26장) 개인 (에스더 3장, 사도행전 26장)

복있는 사람 성경읽기: 출애굽기 35~37절


<예수를 바라보자, 1~3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경주자들이 '믿음의 영웅들'이었다면, 이제 '우리'가 경주를 완주해야 하는 경기장에 서 있습니다.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은 자신들의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우리가 그 경주를 잘 마무리하도록 경기장 관람석을 가득 메우고, '우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둘러싼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입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주 육상경기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육상경기에서 중요한 것은 달리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애물을 '모든 무거운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또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기록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기 위해서 이러한 장애물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당연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경주에서 중요한 것은 경쟁적인 속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목표에 도달하는 인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주는 순간적으로 빨리 달리는 단거리경주라기보다는 '인내'가 필요한 마라톤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믿음의 경주자들은 달리는 가운데, 우리와 동일하게 되신(참조, 히 2:5~18)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그분께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2절). 예수님은 구약 시대 모본들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믿음의 궁극적 목표, 곧 구원을 이루신 분이십니다(참조, 히 2:10). 모든 믿음은 예수님의 구원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온전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완성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치와 죽음을 끝까지 참아내신 인내를 통해서 이루셨습니다(참조, 히 5:7~9). 예수님의 순종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 앞에 놓인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믿음의 경주에서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야 합니다. 장거리를 달리는 경주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서 낙심할 위험'에 직면합니다. 긴 믿음의 경주에서 그런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때 '죄인들의 이와 같은 적개심을 참으신 분'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 곧 '대적자들'이 적개심을 가지고 온갖 비방과 모욕과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동을 하는 데도 그것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그로 인한 수치에 더하여 적대자들의 이러한 적개심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낙심할 위기에 있는 성도들은 그런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 위기를 극복해 내야 합니다.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4~13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 12:4)


 제자들이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무능력 또는 불의함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부성애'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단련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성도들이 지금까지 겪어온 믿음의 삶을 권투나 레슬링 같은 격투기에 비유합니다. 그들이 싸우는 대적은 '죄'입니다. 이 죄는 '얽매는 죄'이기 보다는 '죄를 가진 적대자들'을 말합니다(양용의, 히브리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348). 죄를 가지고 성도를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서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이제 그들의 영적 태도에 대한 책망이 섞인 질문을 합니다(5절). '그런데 아들들에게 주어지듯이 너희에게 주어진 권면을 너희가 잊었느냐?" 이 권면은 잠언의 저자가 자기 아들에게 준 것입니다(참조, 잠 3:11~12). '나의 아들아, 주님의 단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서 책망하실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단련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매로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단련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단련을 받을 때 영적인 교훈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책망하실 때 낙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잘못을 깨닫게 하시려고 당하게 한 고난 때문에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단련'을 설명합니다.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엄격하게 단련하고 잘못에 대해 회초리를 아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엄격하게 '단련하시고', 따라서 그분께서 '매로 때리심'은 우리를 사랑하는 아들로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입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7)


 그는 먼저 '단련을 위해 인내하라'라고 명령합니다(7절). '단련'은 긍정적인 것인데, 이 단련을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아버지가 단련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필수요소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도들이 받고 있는 단련은 근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아들이라는 신분을 확인해 주는 것이므로 환영해야 할 것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단련받기를 싫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경우 이는 참으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함께 받는 단련을 받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생자'들이지 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8절).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단련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힘들어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 12:9)


 '우리는 우리를 단련하는 육신의 아버지들도 존경하는데, 영들의 아버지께는 훨씬 더 복종하고, 그래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단련을 받을 때는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들들은 아버지의 단련의 의도와 목적을 깨닫게 되고, 따라서 아버지를 존경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단련하시는 '영들의 아버지께 훨씬 더 복종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10)


 육신의 아버지들의 단련의 성격을 기록합니다(10절). '그들은 자신들에게 좋아 보이는 대로 잠깐 동안 단련하였지만'. 육신의 아버지의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에게 좋아 보이는 대로' 단련합니다. 둘째, 그들은 '잠깐 동안' 밖에 단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의 아버지와 다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당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단련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모든 단련이 그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단련을 받는 '그 당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궁극적인 결과를 내다보아야 합니다.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자들에게 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히 12:12)


 다시 운동경기 비유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연약해진 손과 힘이 빠진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이것은 마라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가 목표지점에 거의 도달할 즈음 오랜 경주로 거의 탈진하여 손은 연약해지고 무릎은 힘이 빠진 모습입니다. 성도들은 믿음의 오랜 경주로 말미암아 이처럼 힘이 빠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거리를 달리기 위해 '연약해진 손과 힘이 빠진 무릎'을 굳세게 해야 합니다.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3)


 '그리고 너희의 발을 위하여 길을 곧게 하여라.'(13절) 이 권면은 잠언 4장 26절 앞부분에 있습니다. 곧은 길은 목표에 이르는 최단거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주를 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자들이 벗어버려야 할 장애물은 '죄'입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죄로 말미암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안 됩니다. 

 끝으로 '길을 곧게 해야' 할 목적을 밝힙니다(13절). '저는 다리가 어긋나지 않게 하고 오히려 고침을 받게 하여라.' 다리를 저는 경주자에게 굽은 길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굽은 길은 자칫 경주자의 다리를 '어긋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을 곧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다리를 고침 받아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 저는 다리를 고침 받아야 합니다(참조, 히 6:2)


김일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