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5)

by 주인장 posted Dec 2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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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5)

1222

성경: 이사야 111~16/ 제목: 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

맥체인 성경읽기: 가정(역대하 26, 요한계시록 13) 개인(스가랴 9, 요한복음 12)

복있는 사람 성경읽기: 야고보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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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다윗의 후예에 의한 통치의 결과는 평강”(샬롬)이며, 당연히 그는 평강의 왕이라 불립니다. 다윗의 후예의 통치는 당연히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공의와 사랑의 싹, 1~5>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1:1)

 

이새의 줄기에서나는 싹(, ‘호테르’) 혹은 그 뿌리에서 나는 가지(, ‘네제르’)로 표현되었습니다. 줄기와 뿌리에서 무엇이 자란다는 것은 이 나무가 뭉텅 베어졌음을 전제합니다. 다윗의 줄기가 아니라 이새의 줄기가 언급된다는 것은, 다윗 왕가의 붕괴를 암시합니다. “이새의 줄기는 심판받고 무너진 다윗 왕가와, 그럼에도 그 약속을 이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합니다.

또 다윗이 아니라 이새가 언급된 것은, 후에 등장할 인물이 다윗의 후예이기보다는 이새에게서 날 새로운 다윗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는 싹은 역사적 다윗이 아니라 다윗으로 상징되는 세상에 가져올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나아가 메시아적 왕은 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다 자라서 무성한 나무보다는 이제 갓 자라기 시작한 싹과 같은 하나님 나라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는 필연적으로 현존하는 모든 질서를 불완전한 실패로 선언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11:2)

다윗의 후예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영을 소개합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11:3)

 

3절부터는 하나님의 영을 부여받은 이가 일하는 방식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했을 때 나타나는 특성들은 직임 이러한 수행과 관련이 있습니다. 3절에서 이 일을 표현하기 위해 세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첫 번째 동사는 기뻐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리아흐의 히필형으로, 모든 사역의 근본에 여호와 경외가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어지는 두 동사는 모두 재판하다혹은 시비를 가려 주다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들로 샤파트’, ‘야카흐의 히필형이다. , 이새의 줄기에서 날 왕이 해야 할 주요한 일은 재판으로,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날 이의 통치는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와 성격이 같습니다. 새로운 다윗에 의한 통치지만 사실상 그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실현합니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사람의 영광에 따르지 않고, 겉으로 들리는 사람의 큰 소리에 좌우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장차 임할 새로운 다윗은 눈에 보이는 대로 재판하지 않습니다. 눈으로 볼 때는 부국강병의 시대 같고 평안하며 제사가 넘쳤지만, 오히려 그래서 백성은 이사야가 지적하는 현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당시 지도층, 백성들이 보는 것과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새로 임할 이새의 줄기에서 나는 싹과 같은 존재가 보고 듣는 것도 겉으로 보이고 들리는 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든 새로 보내실 다윗이든, 그들이 참으로 보는 사람들이며 듣는 사람들입니다.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11:4)

 

듣고 보는 것에 관한 말씀은 4절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회복과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왕이 땅에서의 영광이나 권력과 같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다고 할 때 영적인 눈으로 본다고 합니다. 하지만 왕이야말로 영적 안목을 하나님께 받은 사람입니다. 강자들의 번성과 권세 잡은 자들의 드높은 노래에 현혹당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이 억압받고 눈물 흘리는 현실을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새로 임할 다윗의 영적인 눈이요, 영적인 귀입니다.

 

심판하며”, “판단할 것이며는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는 회복과 구원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죽일 것이며는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의 입의 막대기그의 입술의 기운을 맞물리게 해서, 이를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다스림을 대행하는 왕의 다스림은 두 가지 성격을 지닙니다. 왕은 하나님의 공의와 바름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고 그들의 억울함을 헤아리고 시시비비를 가립니다. 또 다른 특면에서 왕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괴롭히던 악한 자들을 치고 죽임으로 심판합니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72:4)

그러므로 왕의 공의는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회복시켜 주고 그들을 괴롭히고 억압하는 이들을 꺾으시는 것으로 실현됩니다. 왕은 견고하게 흔들림 없이 이러한 공의를 실현할 것입니다.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11:5)

 

왕이 견고하게 흔들림 없이 공의를 실행하는 것이, 왕의 허리를 두르고 있는 공의”(‘체데크’)성실”(‘에무나’)의 의미입니다(5). 결국 보호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위해 하나님의 정의를 확립하는 것이 새로운 다윗의 직무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정의의 열매를 맺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고,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다잇은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 구현할 것입니다.

 

<그가 바꿀 나라, 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11:6)

 

여호와의 영이 임한 새로운 다윗이 등장하여 공의로 다스릴 때, 그 땅에는 새로운 현실이 임하게 됩니다. 6~10절은 다윗 통치의 결과를 그립니다. 6~9절이 새로운 다윗의 통치로 이룬 공동체적 현실입니다.

공의로운 왕이 통치할 때 세상의 바른 질서가 회복됩니다. 왕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면 그 왕은 사람, 야생동물, 초식동물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통치를 합니다. 다윗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하게 됩니다. 현실에서 어린양은 이리의 먹이에 불과합니다. 이르는 어린양을 그냥 둔 채 살 수 없고, 어린양은 이리와 함께 평화롭게 잠잘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숙명적으로 먹고 먹힐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함께 거합니다. 표범도 어린 염소와 함께 눕습니다. 현실이라면 어떻게 어린 염소가 표범을 옆에 두고 잠들 수 있습니까?

함께 살 수 없는 동물들을 의도적으로 나란히 짝 지웁니다. 다윗의 나라에서는 어린 염소들이 표범과 함께 편안히 잠듭니다.

가장 연약한 존재인 어린아이가 등장합니다. 송아지와 어린 사자, 살진 짐승 역시 동물의 새끼들입니다. 어린아이가 다른 동물들의 새끼를 이끈다는 것은 사람이 만물을 다스리도록 정하신 창조 질서와 관련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송아지, 사자, 살진 짐승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랄 것이고, 커서도 서로를 죽이거나 위협하지 않고 함께 살 것입니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11:7)

 

암소와 곰이 함께 음식을 먹고, 그들의 새끼들 역시 함께 누울 수 없는 짝을 표현합니다. 송아지와 어린 사자, 살진 짐승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공존이 새끼들에게도 이루어진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맹수와 초식동물이 공존하는 평화가 나라가 가능할까요? 다윗의 나라에서는 사자가 육식을 하지 않고 소처럼 풀을 먹기 때문입니다(7). 곰 역시 소나 양을 잡아먹지 않고 풀을 먹습니다(7). 모든 맹수가 풀을 먹는다는 것은 피흘림이 없어진다는 뜻이며, 이는 창조 질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11:8)

 

8절에서 독사와 어린아이가 함께 공존하는 것도 창조 질서의 회복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나 이사야 11장에서 초식은 말 그대로 모든 동물이 초식을 한다는 문자적 의미보다 다른 동물이나 상대를 희생시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게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서로를 상하게 하는 원수가 될 것이라고 예고되었습니다. 이사야 118절은 하나님의 산에 충만한 새로운 다윗이 오면 원수 관계가 해소되고 창조 질서가 회복될 것이라고 선포됩니다.

창세기 315절은 원시 복음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죄로 인해 깨진 사람과 피조 세계의 끝없는 갈등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관계는 새로운 다윗에 의해 회복됩니다. 이 지점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입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11:9)

 

새로운 다윗의 나라는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는 나라입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11:9)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온 세상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나를 알기 때문이라.”(31:34) 그리고 이러한 앎은 여호와가 하나님의 법을 그 백성의 마음 속에 두며 마음에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31:33).

마음에 새긴 법의 의미는 에스겔서에도 나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36:26~27)

예언자들은 그날에 백성들이 여호와를 알게 되고 그 법을 행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역사는 그들에게 부으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한 것은, 온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고 고백하는 것과 연결될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사라진 세상,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뛰도는 세상, 곰의 새끼와 암소의 새끼가 함께 자라고 눕는 세상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온전히 고백하게 되면, 온 세상이 평화의 왕국으로 변합니다.

이사야 2장에서, 열방이 시온으로 오는 유일한 까닭은 그곳에 여호와의 말씀, 여호와의 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가 열방 가운데서 재판하시면, 그들의 칼과 창은 보습과 낫으로 바뀌며,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평화의 나라가 됩니다.

여호와의 종에게 하나님은 학자들의 혀를 주셨고, 그로 인해 말고 곤고한 이를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50:4). 여호와를 알면 평화의 왕국이 이루어집니다. 참된 지식, 참된 앎은 이런 것입니다.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성공과 출세를 위해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세상을 위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해지면 세상에 참된 평화가 임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데 참된 평화가 우리 공동체와 세상에 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임한다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가 바꿀 세상, 10~16>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11:10)

 

10절은 다윗의 통치로 이룬 세상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이를 실현하는 다윗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평화의 왕국은 이스라엘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10절은 그날에 이새의 뿌리가 열방을 향한 표지가 되고, 열방이 그에게 돌아오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오는 싹’(개역개정)이라고 한 것은 히브리어 본문은 이새의 뿌리라고만 기록합니다. “기치는 깃발을 의미합니다.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깃발로 모이듯이, 이새의 뿌리는 열방이 모여드는 푯대가 될 것입니다.

이새의 뿌리는 공의로운 통치를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의 왕국과 그 모습을 보고 열방이 그에게 나아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사야 2장에서 시온으로 몰려오는 열방에 대해 본 것처럼, 이사야 11장에서도 이스라엘 가운데 이루어지는 평화의 나라가 열방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열방의 회복은 메시아적 통치로 이어집니다.

이새의 뿌리, 이는 단순히 다윗의 후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새로운 다윗을 의미합니다. 그를 통해 이루어질 보습과 낫의 나라,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핏줄이 아니라 내용으로 규정됩니다.

3~5절에서 설명하는 바 정의와 공의의 통치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구현되지 않으면 다윗 왕가라 할지라도 무너진다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돌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입니다(3:8~9). 다윗은 정의와 공의를 행한 왕입니다(삼하 8:15). 다윗의 후손은 정의와 공의를 회복하는 인물입니다. 정의와 공의, 곧 미슈파트와 체다카가 행해지지 않으면, 다윗의 왕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의미합니다(22:30). 결국 정의와 공의의 통치는 다윗의 통치, 다윗의 기치, 이새의 줄기의 본질입니다.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16: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22:3~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23:5~6)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11:11)

 

주께서 손을 펴심은 그의 손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앗수르애굽이 먼저 언급된 것은 두 나라가 당시에 강대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주님께서 남은 백성들의 모든 곳에서부터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11:12)

 

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11:13)

 

남북으로 나누어진 이스라엘이 하나가 될 것을 말씀합니다. 적대시하던 감정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서쪽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11:14)

 

회복된 이스라엘은 승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인접한 나라들로 이스라엘을 괴롭힌 나라들은 이스라엘에게 복종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해만을 말리시고 그의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그 하수를 쳐 일곱 갈래로 나누어 신을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11:15)

 

과거에 홍해를 마르게 하사 그 백성을 구원하신 것처럼, 유브라데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신을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과거 홍해 바다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처럼 포로에서 고난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11:16)

 

<김일국 목사(늘푸른전원교회)>